토요일, 10월 10, 2009

When women were priest: magnager of the household of God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Greek-Roman 문화권에서의 household leadership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가정을 중심으로 모였던 가정 교회였으며 (아마도 현재의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 가정 교회의 리더는 그 모임이 열리는 가정의 household manager 였기 때문이다. 가정의 "안방마님"이 교회의 리더 역할을 했기에, "안방 마님"의 역할이 그대로 교회의 리더 역할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and vice versa).

오늘날 교회의 리더는 사회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리더가 교회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회의 리더가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리더쉽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신약 성경 디모데 전서 3장에 설명되어 있는 감독의 자격이라는 것이 사실 "리더쉽의 조건"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디모데 전서에서 말하는 리더쉽의 조건은 sophrosyne (self-control), kosmion(sense of order), 그리고 epeikei(sense of appropriateness)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당시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가정의 모든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던 household manager에게 요구되는 virtue 들이었다.

그러면 오늘날  21세기 미국 이민 사회에서 요구되는 church leadership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성경의 증언대로, 그리고 교단의 헌번이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디모데 전서 3장에서 요구하고 있는 자격 조건들은 그대로 유효하다. 그 외에 실제적인 요소들을 더 제시하라고 한다면 정직, 성실, 겸손, 순종을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정직, 성실, 겸손, 순종 등 4가지 요소들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 뿐만 아이라 교회 밖에서도 요구하는, 소위 "사람됨"의 척도로 삼는 도구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는 표면적으로 이러한 요소들을 더 이상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꿩잡는 것이 매"가 되어 버린 현실 사회의 모습이 그래도 교회에 들어와서는 "큰 교회 담임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정직, 성실, 겸손, 순종 이들 4가지 없이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 의식이 없이 목회하고 있기에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4가지 없는 것들... 이라고 지탄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수요일, 10월 07, 2009

영화 "Luther" 보고나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장 11절)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율법과 복음; 본질과 비본질...

마틴루터가 비텐베르크에 가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고 또 후에 강의를 하면서 발견하였던 그 복음의 내용은 면죄부 판매라는 당시 교회의 관행과 충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 성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죄로부터 그리고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심지어 죄를 지억으니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며 사람을 속이는 악마의 간계에 대해서도 지옥에 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믿음일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장성한 사람의 생각이 아닐까? 더 이상 좋은 상태를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안식처나 유토피아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확신이 장성한 사람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빛과 핏빛은 사실 같은 색인데...
어떤 어른들이 보기에 핏빛인 그 색깔을 어떤 어린아이들은 장미빛으로만 보고 싶어한다.

목요일, 8월 20, 2009

8월 16일 훌러톤 장로교회 설교

본문말씀: 마태복음 20 1-16

제목: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이유 (내 영혼의 광복절)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이 곳 훌러톤 장로교회에서 전할수 있도록 강단을 맡겨주신 노진걸 담임목사님과 당회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6년간의 미국 생활동안 함께 해 주시고 이곳 훌러톤 교회로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주 설교시간에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이 곳 훌러톤 교회는 참 좋은 교회입니다. 처음부터 이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신분들을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지난 6년간 6번의 교회를 경험한 저로서는 정말 미국 생활에서 마지막 교회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였고, 미국에 오기 전부터 좋은 담임목사님 좋은 교회를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하던 끝에 하나님의 인도로, 또 존경하는 서정운 목사님께서 이 교회에 출석하시는데는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등록을 하고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주신줄 믿고 감사하며 교회를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게되어 지난 6년간 미국 생활을 한 끝에 최근에 깨달은 것 그리고 전해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어제 8 15일이 한국에서는 광복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일본 제국 주의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하여 주권을 회복한 날입니다. 주권을 회복하였다는 의미를 갖는 광복절은 노예상태 혹은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다 혹은 놓이게 되었다는 해방보다는 적극적인 의미라고 혹자는 설명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주권을 되찾게 된 것이 단순히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것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 선조들이 한일합방 이후에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국내와 해외에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과 무장 항일운동을 통해서 주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노력들 즉 우리민족의 주체적인 힘으로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고 미국의 원폭투하는 그 시기만을 앞당겼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해방이라고 하면서 주권회복의 수동적인 의미를 강조하든지, 혹은 광복이라고 해서 능동적인 의미를 강조하던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주권의 회복을 기념하면서 그 날을 빛을 다시 되 찾았다는 의미의 광복절이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 주권을 다시 되 찾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로, 우리의 어두원진 영혼에 혹은 낙심해 있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다시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태복음 20절의 포도원 품군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 함께 귀 기울이시기를 원합니다.

흔히 오늘날 486 이후의 세대를 즉, 30대로서 90년 대에 대학을 다닌 1970년 이후 출생자들에 대해 4가지 경험이 없는 세대라고 말합니다. 그 네 가지 경험이란 식민지와 광복의 경험, 625 전쟁의 경험, 419와 유신정권의 경험, 그리고 군부독재와 민주화의 경험을 말합니다. 네가지 경험 모두 다 고통의 경험이고, 이 모든 사건들이 거의 끊이지 않고 일어났기에 이 모두를 경험하신 1940년대 이전에 출생하신 어르신들께서는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으신 고난의 산 증인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88년 올림픽 이후 발전된 조국의 모습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이전에 이민자로서 이곳 미국 땅에 와서 힘든 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그야말로 공중전까지 겪으신 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곳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약속의 땅이고, 이 약속의 땅에서는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2009년이 된 오늘날의 미국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아메리칸 드림이 결실을 맺게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들이란 바로 아프리칸 유학생의 아들이 미국의 44대 대통령이 되고, 푸에토리코 출신의 히스패닉계 노동자 딸이 미국의 대법관이 되고, 비록 대법관으로 임명되지는 못했으나 한국 이민자 2세인 예일대 법대 학장이 대법관 지명후보자로서 자격심사를 위해 청문회에 참였던 일들입니다. 이와 같이 이민자 2세들이 미국의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을 맡게 된 데에는 아무리 힘들고 여러운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이 곳 미국 땅에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노력하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면서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그것들에 반응하는 사람의 태도는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겨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 전에는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 전의 저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하나님을 원망하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깊이 경험한 후에 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모순의 논리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천국의 논리라는 것, 정의의 논리가 아니라 은혜의 논리라는 것, 그리고 가진자의 논리가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의 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품군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원망하는 일을 멈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러면 이러한 문제들에 답하기 위하여 포도원 품군 비유를 6하 원칙, 5W1H방법을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Who? 먼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포도원 주인과 품군들 그리고 청지기입니다. 물론 품군들은 이른 아침과,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 제 십일시에 온 다양한 사람들 입니다. When? 이른 아침, 오늘날 제 삼시는 아침 9시 인데, 성경에 나오는 시간에 6을 더하면 오늘날의 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습니다. 제 육시는 12, 제 구시는 15시 즉 오후 3, 제 십일시는 오후 다섯시 입니다. 그리고 해 저물 때는 문맥상 오후 6시 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Where? 장터와 포도원 What? 포도원 일과 그에 따른 품삯 How? 나중온 자부터 먼저온 자까지, 똑 같이 한 데나리온씩 Why?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필요를 따라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러면 본문을 오늘날의 언어로 미국의 상황에 맞게 해석해서 다시한번 경청하시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일군을 데려다가 포도원에서 일을 시키려고 해뜨자마자 일군을 찾으러 홈디포 앞으로 나간 포도원 주인과 같습니다. 주인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하루 일당으로 100불을 주기로 일군들과 약속한 후에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또 아침 9시에 나가 보니 그 곳에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는 일 없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기 집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면 일한 만큼 섭섭하지 않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 곳에 나가 똑 같은 말로 사람들에게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하고 5시에도 나가보니 3시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왔는데도 무엇을 하다가 늦게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늦게 나와서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너희들은 왜 날이 저물어가는 데도 아직 일하지 않고 여기서 일 없이 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를 데려다가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포도원에 들어가라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하게 되어 포도원 주인이 회계담당자에게 말하여 맨 마지막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가장 먼저 온 사람에게까지 먼저온 순서대로가 아니라 나중에 온 순서대로 하여 하루 일당으로 100불씩 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군들이 모여서서 5시에 온 사람들부터 일당을 받는데, 이들이 100불을 받는 것을 보고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의 약속은 생각지도 않고 제 멋대로 생각하여 100불 보다 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100불을 받게 되었다. 가장 먼저 온 사람들이 실망하고는 주인을 원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니 주인 아저씨, 이 마지막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침 일찍 와서 하루종일 땡뼛에서 뼈빠지게 일한 우리들과 똑같이 100불을 주는 거요?” 주인이 이렇게 따지며 묻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이봐, 아미고. 나는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어. 내가 너에게 하루 일한 일당으로 100불을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한 대로 100불을 주었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헛소리 하지 말고 네가 받은 것이나 가지고 가족들이 기다릴테니까 빨리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여.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은 내 마음이야. 비록 이 사람들이 한 시간 밖에 일을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일한 양으로 따지면 너가 한 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아. 아니 그리고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너가 난리야? 니가 주인이냐? 지금 내가 다른 사람들 도와주면서 좋은 일 좀 하겠다는데, 니가 나를 나쁜 놈 취급하는거냐? 니가 모르는 가본데, 세상 살다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거야.

그렇습니다. 세상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더구나 유학 생활 6년 밖에 하지 않았는데 살다보니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때를 만나 든지, 저런 때를 만나든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도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가장 먼저 일하러 온 일군처럼 말이죠. 마치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일군이 포도원 주인을 원망한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일하러 온 사람이 포도원 주인을 원망하게 된 첫번째 이유는 자신을 맨 마지막에 온 사람과 비교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군들 가운데 아마도 9시에 온 사람들, 12시에 온 사람들, 3 시에 온 사람들은 가장 먼저 온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눈치를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을 원망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주인과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한 데나리온을 약속 받은 사람이고,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약속 한 사람은 맨 처음 온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일하러 온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온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당연히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단위 시간당 일한 효율과는 상관없이 시간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거나, 정말 늦게 온 사람들 보다 많은 일을 했다는데 떳떳하다고 한다면 일의 양혹은 경험치를 기준으로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인을 원망한 사람은 아마도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시간을 기준으로하든지 혹 경험치를 기준으로 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다른 사람 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더 많이 많아야 한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온 일군의 경우에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례인데, 반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례도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든지,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든지 어느 경우에도 이렇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든지 반대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예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은 엄친아/엄친딸입니다. 그리고 이 엄친아/엄친딸은 10대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이 엄친아/엄친딸 입니다. 어르신들 가운데는 엄친아/엄친딸이 무언지 모르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 그것은 엄마친구아들, 엄마친구 딸을 줄인 말입니다. 엄마들이 늘상 자기 자식을 친구들의 자녀들과 비교하면서 엄마 친구 아들은 이번에 하버드에 간다더라, 엄마친구 딸은 이번에 미스 코리아에 나간다더라하면서 자식들에게 열등감을 갖게 만드는 까닭에, 이 단어는 완벽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벽한 사람과 비교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10대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10대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를 다른 사람과 늘 비교하면서 그래도 내가 저 사람 보다는 낫지 하며 우월감으로 스스로를 무장시키다가 또 어떤 때는 완전히 풀이 죽어서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일군이 포도원 주인을 원망하게 된 이유는 주인의 약속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먼저 온 사람들에게는 하루 일한 댓가로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 온 사람들과는 일한 것 봐서 후하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인은 왜 이렇게 약속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은 천국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포도원 주인이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포도원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의 삶 안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주인은 어떤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일까요? 왜 시간당으로 계산해서 주지 않고 일당으로 계산해서 주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시간과 돈을 더 아끼기를 원했다면, 청지기에게 나가서 일군들을 찾아오라고 하고는 자신이 감독하면서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주인이 많이 일한 사람이나 적게 일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하루 일당을 준 것은 많이 일한 사람이나 적게 일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두에게 최소한 필요한 것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나가서 사람들 데리고 온 것은 포도원에 일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돕고 싶은 마음에서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포도원 주인은 3시 이후에 나와서 일거리를 찾는 사람을 5시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 인간은 뭐하다가 이제나와서 일거리를 찾겠다고 저러고 청승맞게 서 있는거야! 밤새 술퍼먹고 늦게 일어나서 게으름부리다가 이제 마누라에게 쫓겨난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 사람에게 일거리를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두시간이라도 일을 해서 가족들은 먹여살려야 하기에 이 늦은 시간에 일거리를 찾아나온 모양이네. 지금 이 시간에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뭐하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사정이 딱한가 보군. 돈 쌓아놓으면 뭐 하겠어. 저런게 사정이 딱한 사람 도와야지.” 그렇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여러차례 장에 나가서 사람들 찾아 다니며 일거리를 준 것입니다. 정말 자신의 이익이 중요했다면, 사람을 찾아 나서지도 일당으로 계산해 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왜 그 일군은 주인과의 약속을 무시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기심과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기심과 우월감은 누가 주인인지를 잊어버리고 자기 편리한 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더 많이 되는대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시간이 돈이라는 자본주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첨예화된 미국에서 6년간 살면서 배운 것 하나는 이 사회에서 시간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시간당으로 패이를 받고 일하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생으로 공부하며 일하는 클레어몬트 컬리지의 중앙 도서관 학교 도서관에서도 시간당으로 받으면서 일을 하고, 교수로 가르치며 일하는 미주 장신에서도 강의료를 시간당으로 받다보니 시간은 돈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점도 있기는 있습니다. 정말 시간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 전보다 더 열심히 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었습니다. 내 시간을 나의 시간계획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뷰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되었습니다. 또 미주장신 도서관장으로 일하면서는, 도서관에서 스탭으로 일하는 학생들 가운데 일은 하기 싫어라 하면서도 어쩔수 없이 돈이 필요해서 시간 채우고 농때이 피우는 학생들을 정죄하게 된 것입니다. 앞의 경우에 있어서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이기심이, 뒤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우월감이 작용하여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과 우월감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번째로, 일군이 포도원 주인을 원망하게 된 이유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때문입니다. 포도원 일군의 비유에서 보면, 가장 먼저 온 사람은 내가 부지런해서 내가 일을 잘해서 먼저 왔다는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늦게 온 사람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해, 즉 손해봤다는 느낌 때문에 주인의 약속을 무시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대로 계산한 것입니다. 즉 한시간 일하고 한 데나이온이면, 열시간 일했으니 열 데나리온 받아야하는 것 아니야?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월감과 이기심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군이 주인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또 무시하게 된 것은 우월감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손해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렇지 않으나 사람들은 손해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체적인 예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법이 실행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으로 말씀하신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했다가는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닌 것을 아는 유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무시했던 것입니다.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데 있어서도 순수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겠지하는 댓가는 바라는 마음으로 혹은 영향력을 미쳐서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한사람이라도 더 도와 주려고 여러차례 장에 왔다갔다 했던 포도원 주인과 같이,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시고, 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오래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면,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막혀버리게 됩니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인간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갈까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성경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맨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저와 여러분들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맨 마지막에 온 사람은 일 시간만 일하다고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받고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이 주시다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놀라움은 다른 사람들도 많이 일했건 적게 일했건 상관없이 하루 생활하는데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똑 같이 받게 되는 것을 보면서, 필요한 만큼의 돈을 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기쁜마음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삶에는 놀라움, 감사,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항상 기뻐할,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되는 이유는 첫째,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신의 이기심과 우월감 때문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반대로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찾아다니시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또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우리안에 천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맨 마지막에 와서 은혜를 경험한 일군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 일군과 같이 놀라움과 기쁨과 감사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는데, 이제 삼위로 일체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하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기심과 우월감으로 손해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금요일, 8월 14, 2009

A man of 'able' vs. A man of 'available'

이 개념을 언급한지 벌써 7년이 넘은 것 같다.
아마도 아람누나에게 했던 이야기 같은데... 본인은 기억못하겠지

지금도 여전히 이 두개념 사이에 상당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늘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to be able 과 to be available을 다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특별히 "고지"를 점령하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서 고지를 점령해야만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능력이 있는 사람만 되어서는 그 능력이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시간이 없다, 열쇠가 많다, 요사이는 카드가 많다는 것은 그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표지이다. 그러나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시간을 좀 내어달라고 하는 것은 혹은 바쁜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달라고 하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이다. 늘 바쁘다는 사람에게 시간을 좀 내어달라는 것이...참...

그러나 어떤 사람이 능력이 많고 늘 바쁘지만 언제든지 스케줄만 맞추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환영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늘 바쁘다고만 말하는 사람, 늘 핑계거리가 있는 사람과는 가까워지기가 혹은 함께 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같이 일하자고 할때도 '내가 할 일이 많아 바빠서 못 하겠다고 하지 않을까?' 마치 잔치집에 초청받았으나 그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열일 제치고 가야죠..."라고 말하는 사람...
"제가 쫌 많이 바빠서 다음 기회에..."라고 말하는 사람...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금요일, 7월 24, 2009

Don't Give Up - Lyric

Don’t give up someone really loves you

Don’t give up someone really cares

Don’t give up someone really loves you

And that someone is the Lord

Keep the faith someone really loves you

Keep the faith someone really cares

Keep the faith someone really loves you

And that someone is the Lord

Don’t give up someone really loves you

Don’t give up someone really cares

Don’t give up someone really loves you

And that someone is the Lord

Keep the faith

Keep the faith

Keep the faith

And that someone is the Lord

And that someone is the Lord

화요일, 7월 07, 2009

명, 정품, 모조품

2009 여름 고대교회 교부연구 수업을 마치고나서...


최근 한국이나 미국에서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소위 '이단'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또 이를 경계하는 시청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PD 수첩에서는 그 '이단' 가운데 하나인 신천지 집단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방영하기도 하였습니다.

과연 이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대답한다면 '교부들에게 물어봐...'

그러면, 교부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부들의 글로부터 정리한 이단과 정통의 개념을 우리 자신의 말로 설명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단과 정통, 정통과 이단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수업에 참여했던 김 목사님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단은 마치 모조품(짝퉁)과 같고, 정통은 마치 정품과 같다. 그런데 이단을 모조품을 비유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모방하는 소위 '명품'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즉 명품과 짝퉁의 관계를 통하여 이단이 왜 생기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통안 혹은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제품을 만든 사람의 장인 정신과 따라올 수 없는 디자인등으로 명품의 반열에 오른 제품들이 있습니다. 소량의 제품만을 만들어 판매하고 어떤 경우에는 가격을 엄청나게 높게 책정하여 '아무나' 살 수 없게 만들어 그 제품을 소유한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명품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비싼 제품이 그 만큼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합니다. 그러하기에 그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만한 댓가를 치룰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도 그만한 댓가를 치루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경제적인 또는 심리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명품을 소유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이러한 사람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모조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경우에는 명품과 모조품을 구분하기가 쉽지 아니하거니와, 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보이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 모조품이 명품보다 더 좋은 품질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명품과 모조품을 구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조품을 만드는 것은 오리지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도적질 행위이고, 또 그것은 허영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기만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만든 모조품이라도, 모조품은 모조품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warranty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가지고 다니는 동안 다른 사람들 보기에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거기까지, 잠깐 동안 허영을 채워주는 것으로 그 역할이 끝입니다. 품질을 보증할 수가 없습니다. 이단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잠깐의 눈속임, 그리고 허영심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혹은 다음 세상에서의 영생복락을 약속한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보장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신천지의 경우 144000명이라는 숫자가 채워지면 얻게 되다는 '육체의 영생'과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오게 될 '돈'이 결국 그들로 하여금 그 집단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한다면 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 모조품을 가지고 명품인척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단으로 이끄는 것은 사람들의 허영심이 원인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단으로 이끄는 것이 사람들이 허영심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허영심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다시말해서 오리지날 명품도 또한 명품을 카피한 짝퉁도 아니지만, 그 사이에는 명품을 만든 회사에서 만들기는 했지만 약간의 결함이 있는 제품이 있습니다. 정품도 아니고, 작퉁도 아닌 제품이 있습니다. 이런 제품들은 아웃렛 매장으로 나오게 됩니다. 제품을 판매하는 사람과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곳, 이곳이 소위 프리미엄 아웃렛입니다. 이런 물품을 판매하는 곳에는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댑니다. 가격과 품질을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러나 정품은 아닙니다. 명품은 대체로 명품만을 따로 취급하는 명품전문 매장이 있습니다. 따라서 얼마를 주고 샀는가가 명품을 명품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샀는가가 명품을 명품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품 정품을 사기 위해서는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하고, 또 그 정품을 판매하는 전문매장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신앙을 지키는 일에도 많은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또 정품 신앙만을 가르치는 교회로 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격과 품질을 모두 만족할 수 있다는 편리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은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교부들이 목숨을 내놓고 수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전통위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비록 지불해야할 댓가도 많고, 편리함도 없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리고 교부들을 거쳐서 종교개혁 이후 장로교 전통에 이르는 정품이기에 정품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일요일, 6월 07, 2009

인격훈련

예전부터 공부는 마음 공부라 생각해왔다.
더구나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하는 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공부가 필요한 것이었기에
또 준비해온 그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것이었기에...

오늘 PTSA 학위 수여식이 있었다
총회장 목사님의 설교내용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인 빌레몬처럼
사람을 살리는 사람, 만나면 기분좋은 사람,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 자신만을 보더라도 만나면 짜증나는 사람
얼굴보기 싫은 사람, 힘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주변에 있을 때가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만나면 짜증나는 사람, 얼굴보기 싫은 사람, 힘 빠지게 만드는 사람일 수 있겠지.

월요일, 5월 04, 2009

Doing Theology

신학을 공부한다는것, 혹은 신학함을 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공부(工夫)라는 한자어를 통해서 의미해 왔던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학교 시절 교감선생의 한마디는 어쩌면 오늘날 '공부'라는 단어를 왜곡시켜 사용하고 있는 대다수의 몰상식한 필부들의 공부에 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공부를 왜하냐는 그 양반의 질문에 "훌륭한 사람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가 "훌륭한 사람은 무슨 훌륭한 사람, 고등학교 갈려고 공부하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면박을 주었던 그 사람은 공부가 무언지 모르는 사람이었겠지.

나이 40이 다 되어가도록 공부를 하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또 다시 공부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또 다시 "훌륭한 사람되려고 한다"고 말하겠다. 더 이상 진학할 곳이 없이 최고의 학위 과정에 온 이상 또 무슨 상급학교 진학이 공부의 목적이 되겠는가? 또 이미 목사가 된 지금 고액 연봉이 어찌 공부의 목적이 될 수가 되겠는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마친 이후에 좋은 직업,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겠지... 공부가 투자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공부가 정말 투자이고, 그 투자의 목적은 그 투자를 통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이익은 무엇이 되어야만 할까?

남보다 안정된 자리? 남보다 높은 연봉? 그런 것들이 욕심이 났더라면 목사가 되지 않았겠지. Divinity School 이 아니라 Law School을 갔겠지. Management School은 그 놈의 숫자 보기 싫어서 가지 않았을테고... 그런데 워낙 없이 살다보니 가끔은 정말 가끔은 Law School 을 졸업하고 누릴 것 누린 다음에 돈을 쌓아놓고 그 돈으로 신학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랬다면 아마도... 돈 때문에 고생은 들 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깊이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눌 이야기들이 없다면 어쩌면 하나님과 나와의 추억이 없다면... 어떤 드라마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추억은 힘이 없다고.간들 간의 관계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 한번 헤어지면 남남이 되는 관계이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아내 그리고 내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추억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일 것 같아. 그 추억들이 서로의 사랑을 단단하게 하고 힘이되는 것인텐데 말이지.

그래서 나는 추억에 힘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힘들때 힘을 주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추억, 나와 가족들과의 추억 그런것들이기 때문에.

신학함이란 공부란 어쩌면 나와 책과의 추억, 나와 성경책과의 추억,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말 지겹도록 읽혀지지 않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난 이후에 맛보는 기쁨, 그리고 성경말씀 한구절 한구절이 내 삶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던 것을 체험한 후에 느낀 감동,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은혜 등등이 하나하나 쌓여서 추억이 되어 가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한 사람이 할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목사로 학자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그저 시험 통과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 대충 읽어보고 시험에 통과할 수도 있겠지. 시험은 시험이니까 하고 말하면서... 그러나 공부라는 것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책 한권 한권과 씨름하면서 그 책들과 추억을 만들어 간다면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공부하는 시간, 공부했던 시간들이 모두 다 추억의 시간들이 되겠지..

금요일, 5월 01, 2009

라틴어 공부하기

끝없이 반복되는 단어들, 변화형들, 이 언어를 공부하면서 드는 생각은 머리 많이 써야 한다는 것.
동일한 단어가 심지어 4개의 의미를 포함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정확한 용어를 골라 내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언어는 물론 말하고 읽고 듣고 쓰는 것 모두를 포함해야 하지만, 라틴어로 말하고 들을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읽고 쓰는 것 만으로, 아니 읽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
이 언어를 마스터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는 해야지...

7월 12일 주일 설교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는 지혜”

카리타스나인 영성사연구소 7 월 12 일 주일 설교  “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는 지혜 ” 욥기 42:1-9   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지난 주까지 역사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