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한분 한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오늘은 순서에 따라서 역대하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의 통제 하에 있었던 시기에 쓰여진 책으로서,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선택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 때문에 역대기를 기록한 저자는 북왕국을 다루지 않고 남왕국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포로 기간동안 북쪽 지역은 앗수르의 이주정책으로 북이스라엘에 지역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지역으로 옮겨가고, 다른 이방 민족들은 북 이스라엘 지역으로 옮겨왔습니다. 남아 있던 유대인들과 이주한 이방인들 간에 결혼을 통한 혼혈이 이루어졌고, 이방인들이 실질적인 지배를 하게 되었기에 포로 경험이 없는 혼혈인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음을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남왕국와 북왕북을 비슷하게 다루고 있는 열왕기와는 달리 역대기는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해 남쪽의 유대 왕국의 역사에 집중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또한 유대의 왕들에 대해서 기록할 때도 실정보다는 업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특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일한 왕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와 역대기에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역사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냄으로써 포로 시기를 견뎌낸 생존자들에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습니다.
역대하에 등장한 왕들은 대체로 세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평생 여호와를 의지한 왕들, 둘째는 처음에는 여호와를 의지했지만 나중에 마음이 변한 왕들, 세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악했던 왕들입니다. 역대하에 등장한 21명의 왕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다양한 모습도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모습과, 다른 하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선을 행한 모습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모습을 악하게 보시고, 또 어떠한 모습을 선하게 보시는 걸까요? 마음이 변했던 사람의 일생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함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솔로몬 말고도 몇 사람이 있는데요, 대표적인 사람이 아사입니다. 역대기 14장부터 16장에 기록된 아사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하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 반대로 악을 행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살펴볼 것은 아사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했던 모습입니다. 아사 왕은 통치 초기부터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고자 힘썼습니다. 아사 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왕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신앙회복 운동을 진행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섬기고 있던 이방 신과 관련된 제단과 우상들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14장 2절과 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사는 주 그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석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부수었다.” 이와 같은 우상 제단과 신상에 대한 척결 정책은 요시아 왕의 개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시아 왕의 개혁에 대해서는 역대하 34장 2-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시야는 왕이 된 지 여덟째 해에, 아직도 매우 어린 나이에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의 통치 십이년이 되는 해에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없애고 유대와 예루살렘을 깨끗하게 하였다.” 아사와 요시야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은 한 것은 바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우상들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도록 적극적으로 우상을 만들든지, 또는 하나님의 자리를 우상이 계속해서 차지하도록 소극적으로 우상을 방치하든지 결과는 동일합니다. 두 방법 모두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예는 아론이 만들었던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내용을 살펴볼 때 확인했던 것처럼 아론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기다리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 금송아지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아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아론의 말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대신 우상을 섬기려고 의도한 것도 아닌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상을 섬기게 된 사람도 생겼습니다. 아론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을 분열시킨 여로보암도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 두개 만들어서 하나는 베델에, 또 다른 하나는 단에 두고 이 금송아지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라고 말하며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베델과 단에서 금송아지 모습을 한 하나님을 섬기도록, 즉 우상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이같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정치적은 이유였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남쪽 유다 왕국으로 가게 되면 그들의 마음도 예루살렘을 향하게 될 것이 걱정되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름만 여호와일뿐 실상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상을 제거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추진했던 또 다른 일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맺었던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역대하 15: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 그들은 그들이 가져 온 전리품 가운데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주님께 희생제물로 잡아 바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조상의 하나님만을 찾기로 언약을 맺었다.” 언약을 맺었다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약속을 했다는 말입니다. 신앙을 회복한다는 것은 예배의 회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약속의 회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든지,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든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든 약속을 지키기 않는 것은 관계를 깨지게 만듭니다. 아니 관계를 깨기 위해서 약속을 깨기도 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약속했던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는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약속한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해서 지키겠다고 결단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개혁을 진행했던 왕들은 하나님을 예배를 하고, 성경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읽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계속해서 이행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아사 왕도 예배를 통해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찾기로 결단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이 시간 예배의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본질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예배당에 모이는 것과 야구장에 모이는 것이 다를 바가 없이 그저 문화를 소비하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아니, 야구장에 가는 것만도 못한 모습이 됩니다. 야구장에 가면 스트레스라도 풀고 즐기다 오는데, 교회에 가면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다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사 왕은 예배의 본질이며 신앙의 본질인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찾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없애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다고 약속하며 여호와 신앙을 회복했던 아사가 말년에는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왕이 된 이후 35년 동안 하나님을 잘 믿어온 아사가 그의 말년에는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아사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잘 하다가 마지막에 삐딱해진 사람이 아사 한 사람만은 아닙니다. 솔로몬도 히스기야도 말년에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폭군이 되어 백성의 생명을 위협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쓴 결과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왕의 역할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잘 다스리는 일입니다. 왕으로서 수행해야할 그 본질적인 일들, 가장 중요한 일들을 해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악하게 보셨을까요? 아사의 경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동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만 의지하는 것을 악하다고 어리석다고 여기십니다. 이에 대해서 16장 7절 부터 9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서 아사 왕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임금께서 시리아 왕을 의지하시고, 주 임금님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셨으므로 이제 시리아 왕의 군대는 임금님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에티오피아 군과 리비아 군이 강한 군대가 아니었습니까? 병거도 군마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임금님께서 주님을 의지하시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임금님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있게 해주십니다. 이번 일에 임금님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에 휘말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니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사 왕은 젊은 시절 에티오피아 군대와 리비아 군대와 전쟁을 치룬 일이 있습니다.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와주셔서 에티오피아 군대와 리비아 군대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시리아 군대를 의지했습니다. 왕실 창고 에 있던 금과 은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쳤던 성전 창고의 금과 은까지 시리아의 왕 벤하닷에게 보내면서 북이스라엘과의 군사동맹을 파기하고 남유다와 군사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그 결과 북이스라엘 바아사 왕의 위협으로부터 잠시동안은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악이자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발에 병이 나서 위독하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들을 찾았습니다. 물론 발에 병이 나면 의사들을 찾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건강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만을 의지한 것을 문제삼으셨습니다. 개인과 국가의 위기를 맞이할 때 조차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을 죄악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을 때 죄악시하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죄악은 백성들을 학대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16장 10절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사는 선견자의 이 말에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때에 아사는 백성들 가운데서도 얼마를 학대하였다.” 선견자 하나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사 왕에게 전했습니다. 물론 그 말의 내용이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전한 것일 수도 있고, 왕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니는 왕을 위해서 왕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하나니의 말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하나니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하나니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 단순히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그랬던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아사는 백성들 가운데서도 얼마를 학대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백성들 대하는 것은 왕으로써 큰 잘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정을 실천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정과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래서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아사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고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무정하고 무자비한 행위는 죄악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사왕의 일생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하다가 말년에 악을 행했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나, 또 반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나 모두 엄청난 힘과 돈이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심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선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한편, 하나님 아닌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행하는 것이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아닌 것을 가져다 놓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사의 삶을 거울 삼아서, 일평생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심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