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 주일 설교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는 지혜”
욥기 42:1-9
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까지 역사서에 해당되는 책들을 살펴보았고, 오늘부터는 시가서와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시편은 시가서로 분류하고, 욥기, 잠언, 전도서는 지혜문학으로 분류합니다.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이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참된 지혜의 원천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지혜를 얻어, 지혜롭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문학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문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삶입니다. 삶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모습들을 다루는데, 특별히 욥기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난과 관련해서 구약성경은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율법주의 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사상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권선징악 사상과도 유사합니다. 권선징악을 영어로는 poetic justice 라고 표현하는데, 직역하면 문학작품에나 등장하는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삶을 보면 착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악한 사람이 많은 것을 누리고 잘 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로 들면, 법을 잘 지키면 복은 커녕 손해를 보게 되는 것 같고, 죄를 지은 사람들이 벌을 면하는 등 정의로운 사회와는 거리가 있는 것 처럼 보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와는 상반된 또 다른 입장은 창세기의 요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복음주의 입니다. 고난이 죄의 댓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는 수단으로 설명됩니다. 원래 모순투성이인 인생을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그 모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는 믿음과,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욥기는 하나님도 의인으로 인정한 욥이 받는 고난과, 고 고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욥과 그의 세 친구와 젊은 엘리후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 그리고 욥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이라 주제를 다루면서, 고난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 곧 고난의 죄의 결과라는 율법적인 신앙과는 다른 방향에서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욥기 42장1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첫째로, 욥기가 알려주는 고난의 의미는 믿음의 시험입니다. 욥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요구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의도, 곧 고난의 의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2장 3절 부터 6절의 말씀을 메시지 성경의 본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내 친구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처럼 정직하고 약속을 잘 지키며, 하나님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굳게 붙들었다! 네가 나를 부추겨 그를 무너뜨리고자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사탄이 대답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게 사람입니다. 주께서 손을 뻗어 그의 건강을 빼앗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틀임 없이 주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저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네 마음대로 해 보아라. 하지만 그를 죽이지는 마라.”
사탄은 욥이 자녀들과 소유물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건강을 빼앗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고 하더라도 욥은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통에 몰아넣어 욥의 믿음을 시험하겠다는 두 번에 걸친 사탄의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첫번째는 소유와 자녀들을 빼앗아서 고통을 가했고, 두번째는 건강을 빼앗아서 고통받게 함으로써 사탄은 하나님과 욥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려고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편, 건강을 잃어 버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몰라볼 정도로 비참한 모습을 한 욥을 보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재를 날려 머리에 뒤집어 쓰기도 했습니다. 또 그들은 일주일 동안 욥과 함께 울면서 위로해 주었지만 욥이 겪는 너무나 큰 고통을 보고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욥을 향해 세 친구는 자신의 경험과 율법주의적인 신념을 가지고 욥을 비난합니다. 욥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정죄하면서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친구들과 오랫동안 논쟁을 벌입니다. 처음에는 위로해 주기 위해서 찾아온 친구들이 결국에는 욥을 비난하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고난 가운데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요셉의 고난 이야기로 대표되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 이야기로 대표되는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는 기독교 전통에서 “고난”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요셉은 고난을 통해서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해내고,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냅니다. 성자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에 대한 믿음은 성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것이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고난의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로마제국에서는 사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을 지어주며 교회를 후원하고 제국의 정신적인 통일을 위해서 기독교를 장려했습니다. 그 결과 박해 받던 기독교가 이제는 이교도들을 박해하는 종교가 되었고, 출세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원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고통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광야로 나가기도 했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기도 하고, 금욕적인 삶을 선택하면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갈 때, 평안하고 즐거울 때, 딱히 필요한 것이 없이 풍족할 때는 믿음을 발휘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고난의 상황이 되면 평소의 믿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믿음의 척도입니다.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둘째로, 욥이 말하는 고난의 의미는 믿음의 단련입니다. 단련 혹은 연단은 불순물이 제거되고 정결하게 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철이 필요하지만, 좋은 철로 만든다고 다 좋은 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장장이가 칼을 만들 때 좋은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들겨 편 후에 접기를 여러 번 반복합니다. 쇠를 불에 달구는 과정에서 쇠 안의 불순물들을 최대한 없애고, 또 두들기면서 쇠 안의 불순물을 최소화하게 됩니다. 불에 달구고, 두드리고, 물에 담가 식히고… 이런 과정을 수업이 반복하여 단단한 칼을 만드는 과정을 단련이라고 합니다. 마치 쇠를 불에 담그고, 두드리고, 물에 담드는 것과 같은 고통의 시간은 사람의 믿음과 마음을 단련시킵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당하는 과정 가운데서 고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난을 비롯하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 마저도 선하게 바꾸셔서 단련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고난이라 하더라고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42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후에 욥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의로움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불평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함부로 지껄이고 떠들었다”며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42장3절부터 6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 주께서 “누가 이렇게 물을 흐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나의 의도를 지레짐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자백합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내 능력 밖의 일에 대해 함부로 지껄였고,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을 놓고 떠들어 댔습니다. 주께서는 ‘귀 기울여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몇 가지 물어볼 테니 네가 대답을 하여라 하셨습니다. 인정합니다. 전에는 내가 주님에 대한 소문만 들었으나 이제는 내 눈과 내 귀로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다시는 전해 들은 말의 껍질, 소문의 부스러기에 의존해 살지 않겠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단련된 욥은 많은 말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하였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 하였던 것조차 하나님 앞에서 믿음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욥이 회개한 내용은 고난의 원인이 되는 잘못들에 대해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고난의 과정 가운데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결백을 주장함으로써 마치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처럼 보이도록 한 것에 대해 회개한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특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당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 마저도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공의로운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조차 침묵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처분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이 당한 고난의 이야기는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단련된 사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부터 3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본 욥의 이야기는 고난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시험이며 믿음의 단련이라는 복음주의 관점에서 살펴본 고난의 이야기 입니다. 고난의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단련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시험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어떤 시험이든 모범답안은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믿음의 시험을 치루게 될 때 우리가 적어야 할 모범 답안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셔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였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사도행전 20장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