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04, 2009

Doing Theology

신학을 공부한다는것, 혹은 신학함을 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공부(工夫)라는 한자어를 통해서 의미해 왔던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학교 시절 교감선생의 한마디는 어쩌면 오늘날 '공부'라는 단어를 왜곡시켜 사용하고 있는 대다수의 몰상식한 필부들의 공부에 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공부를 왜하냐는 그 양반의 질문에 "훌륭한 사람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가 "훌륭한 사람은 무슨 훌륭한 사람, 고등학교 갈려고 공부하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면박을 주었던 그 사람은 공부가 무언지 모르는 사람이었겠지.

나이 40이 다 되어가도록 공부를 하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또 다시 공부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또 다시 "훌륭한 사람되려고 한다"고 말하겠다. 더 이상 진학할 곳이 없이 최고의 학위 과정에 온 이상 또 무슨 상급학교 진학이 공부의 목적이 되겠는가? 또 이미 목사가 된 지금 고액 연봉이 어찌 공부의 목적이 될 수가 되겠는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마친 이후에 좋은 직업,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겠지... 공부가 투자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공부가 정말 투자이고, 그 투자의 목적은 그 투자를 통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이익은 무엇이 되어야만 할까?

남보다 안정된 자리? 남보다 높은 연봉? 그런 것들이 욕심이 났더라면 목사가 되지 않았겠지. Divinity School 이 아니라 Law School을 갔겠지. Management School은 그 놈의 숫자 보기 싫어서 가지 않았을테고... 그런데 워낙 없이 살다보니 가끔은 정말 가끔은 Law School 을 졸업하고 누릴 것 누린 다음에 돈을 쌓아놓고 그 돈으로 신학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랬다면 아마도... 돈 때문에 고생은 들 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깊이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눌 이야기들이 없다면 어쩌면 하나님과 나와의 추억이 없다면... 어떤 드라마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추억은 힘이 없다고.간들 간의 관계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 한번 헤어지면 남남이 되는 관계이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아내 그리고 내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추억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일 것 같아. 그 추억들이 서로의 사랑을 단단하게 하고 힘이되는 것인텐데 말이지.

그래서 나는 추억에 힘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힘들때 힘을 주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추억, 나와 가족들과의 추억 그런것들이기 때문에.

신학함이란 공부란 어쩌면 나와 책과의 추억, 나와 성경책과의 추억,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말 지겹도록 읽혀지지 않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난 이후에 맛보는 기쁨, 그리고 성경말씀 한구절 한구절이 내 삶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던 것을 체험한 후에 느낀 감동,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은혜 등등이 하나하나 쌓여서 추억이 되어 가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한 사람이 할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목사로 학자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그저 시험 통과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 대충 읽어보고 시험에 통과할 수도 있겠지. 시험은 시험이니까 하고 말하면서... 그러나 공부라는 것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책 한권 한권과 씨름하면서 그 책들과 추억을 만들어 간다면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공부하는 시간, 공부했던 시간들이 모두 다 추억의 시간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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